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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번째 이야기> 홀로 여행을 시작하다.
  • 기사등록 2020-12-04 18:57:05
  • 수정 2020-12-06 04: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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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 경/수필가


올해 꼭 해보고 싶었다. 혼자 여행 다녀오는 것을. 내년 봄 끝 무렵, 영국에 두 달 정도 머물면서 기행문을 쓰고 싶은 로망을 갖고 있다. 그러려면 혼자 국내여행부터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아 연 초에 계획을 세웠다. 막상 출발하려니까 자신이 없어진다. 어찌어찌 망설이다 보니 상반기가 훌쩍 지나갔다. 안되겠다 싶어 즉시 실천하기로 마음을 굳게 가다듬었다.


첫 번째 여행지는 청도 운문사로 정했다. 그전부터 가고 싶었다. 광명역의 부산행 플랫 홈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무심코 앞에 놓인 시커먼 철로를 봤다. 순간 톨스토이 소설 속 여주인공인 안나 카레리나가 철로에 뛰어 든 장면이 그려진다. 가족을 버리고 사랑을 추구한 안나의 모습이 슬프다. 성격은 다르지만 나도 하고 싶은 걸 추구하고자 혼자 여행을 시작하는데.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여행 할 때는 대화하느라 떠오르지 않았던 편린들이 생각난다.


달리는 차창으로 초록빛 융단 같은 벼를 바라본다. 벼는 가장 이타적인 식물이라 더욱 아름답다. 한 달여 전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바라본 초원이 겹쳐진다. 감탄을 연발 하면서 봤던 그곳이지만 지금 보이는 우리 논밭이 더 정겹고 애착이 간다. 군데군데 세워진 각이 져 있는 회색 고층아파트가 초록 들판의 평온을 깨트린다. 이리도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하는지.


자유롭다. 시간이 알차게 지나간다. 여럿이 나눠먹는 과자는 순식간에 없어지지만 혼자 먹는 과자는 조금씩 아껴 먹는 것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간다. 혼자 여행은 차분하다. 수선스럽지 않고 들뜨지 않는다. 기차 밖 전선줄이 춤을 추며 지나간다.


운문사는 경남에 가까운 경북에 위치하고 있다. 충분한 경험을 위해 일부러 12일 동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를 정했다. 출발하면서부터 약간 흥분됐다. 뭔가 정할 때, 다른 사람 의견 신경 안 쓰고 결정 하는 게 정말 좋다. 교통비등 비용과 시간을 계산해보고 마음이 가는 대로 정한다. 식당도 내가 먹고 싶을 때 갔다. 밥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어중간해서 먼저 도착지부터 가느라 식사는 뒤로 미뤘다.


누가 빨리 오라는데도 없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나 혼자 즐기는 여행! 버스정류장부터 절까지 가는 길 양쪽으로 용트림 하는 듯한 굽은 소나무들이 도열해서 환영해준다. 담백하면서 은은한 풀잎 향기에 취한 채 걷는다.

운문사는 고려시대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거처하던 절이라고 한다.


일연스님의 기를 받아서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첫 여행지를 정한 것 치고 잘 정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대웅전에 들어가서 삼배를 올렸다. 다른 전각들과 나무들도 천천히 둘러봤다. 비구니승가교육기관이라 그런지 정갈하고 아주 조용했다. 절은 컸지만 스님들이 공부하는 장소라서 부분만 볼 수 있게 했다. 벼르고 왔는데 조금 서운했다. 나이의 힘인지 홀로 다니는데 대해 우려했던 두려움은 없다. 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즈넉한 절에서 속세로 돌아왔다.


서서히 해가 기운다. 저녁식사를 하러 청도온천호텔 앞 삼겹살 전문식당을 찾았다. 청도에는 한재미나리가 특산품이라고 한다. 미나리와 삼겹살 구이가 유명하다고 해서 먹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먹어볼 수가 없었다. 2인 이상만 된다고 한다. 혼자 일 때 겪을 수 있는 다른 구속을 받았다. 복병이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출발할 때 홀가분했던 건 어느새 사라지고 슬며시 식구들 얼굴이 가슴 한 쪽에 자리 잡는다. 같이 왔더라면 맛있게 잘 먹었을 텐데. 미나리의 향긋한 향과 어우러진 삼겹살은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꿩 대신 닭으로 미나리비빔밥을 먹었다.


숙소도 정하는데 갈등한다. 식당 근처 하룻밤에 삼만 원이라고 쓰여 있는 모텔을 기웃거린다. 하룻밤 자고 나면 될 것을 혼자면서 공연히 비싼데 갈 필요 있나 망설인다. 그래도 잠은 제대로 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온천호텔로 들어갔다.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와서 과자를 안주 삼아 마신다. 나를 돌아본다. 느새 반백을 훌쩍 넘겼다. 숨 가쁘게 지나왔다. 되도록 후회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다. 그렇다고 어찌 후회를 안 할 수 있겠는가만, 나름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모르겠다. 그동안 잘 살아 왔는가. 순간 결정하는 과정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는가. 저 깊고 깊은 기억의 우물 속 파편들을 끌어 올린다. 인생이 100세라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예순을 넘기면서 많이 아프고 힘들어한다. 엄마도 겨우 환갑을 넘기고 돌아가셨다. 나도 살만큼 살았구나 싶다.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는다. 이제부터 강하게 붙잡고 있던 끈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고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속삭인다.


새벽에 일어나서 커튼을 젖혔다. 멀리 보이는 프로방스 빛의 축제장소는 밤의 모습과 낮의 모습이 이집트 나일강변 동쪽의 풍요로운 녹색지대와 서쪽의 황폐한 왕가의 계곡을 떠올리게 한다. 밤은 수많은 전구와 조명기구가 켜져 있어 화려했지만 아침은 죽은 도시처럼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식구들이 눈에 밟힌다. 이걸 극복할 수 있을까? 아직 어린 아들이 자꾸만 눈에 어리고. 가족과 함께 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우선으로 한다고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가치 있는 건가에 생각이 머문다. 돌아오는 기차는 더디 가도 너무 더디 간다. 빨리 가서 가족이랑 저녁 먹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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