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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네 살에 무슨 일이




이 단 경/수필가


엄마는 건강했다. 요즘 백세시대라더니 주변에 아흔 살 넘은 어르신들을 종종 본다. 여든 살 넘은 어르신은 더 많이 본다. 신문에서도 일흔 살 넘은 어르신이 자신도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아흔 살 넘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므로 사회문제가 된다고 왕왕거린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는 나보다 엄마가 더 신이 났다. 나는 다섯 명이 달리기를 할 때 앞에 뛰어가는 친구가 넘어져야 겨우 3, 공책 한권을 타온다. 그것도 어쩌다 있는 일. 그래서 1년에 한번 있는 운동회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엄마는 학부모달리기 대회 뿐 만 아니라 시민체육대회 때도 선수를 자청할 정도였다. 운동회 때 결과물을 보면서 엄마는 자기를 안 닮은 딸을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다 성장한 내 키는 엄마 어깨까지였다.

엄마는 신체가 튼튼하지 않은 아버지를 돕느라 일도 열심히 했다. 집안일보다 논 밭 일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실까봐 늘 인삼을 사서 달여 드렸고, 겨울이면 흑설탕에 생강을 저며 조그만 단지 안에 넣어서 방 윗목에 두고 매일 한 숟가락씩 드시게 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했다.


그러던 엄마가 인생의 링에서 KO패로 쓰러졌다. 췌장암으로 예순네 살에. 그렇게 건강하고 여장부였던 엄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가족을 뒤로 한 채,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갔다. 동네 분들이 네 엄마가 그렇게 돌아가다니 믿을 수가 없다. 거뜬히 백 살까지 살 줄 알았는데……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집은 딸만 여섯 형제다. 위로 언니가 둘, 아래로 동생이 셋이다. 큰언니가 결혼할 때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딸이 많은 엄마는 첫딸이 시집을 잘 가야 나머지 딸들도 잘 간다고 하면서 전전 긍긍했다. 큰언니 결혼식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엄마가 집안을 둘러보며 쓸쓸해하던 표정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큰언니 부부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듯 사이좋게 잘 살았다. 경기 좋은 80년대에 큰 형부가 의류사업을 하면서 살림이 넉넉해졌다. 부모님은 큰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큰언니는 딸만 있는 부모님에게 아들이 없는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좋아하는 여행을 자주 보내드렸고, 아들 못지않게 정성껏 집안일을 챙겼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큰 형부의 넉넉한 마음씨 덕분이다. 안양 변두리에서 학교 다니기 불편하다고 동생들을 서울에 있는 언니 집에 머물게 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아버지는 첫째 사위가 당신이 할 일을 대신해서 늘 고마워하고 미안해하셨다. 아들 없는 집에 기둥 같은 큰 형부였다. 처제가 많은 데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보살펴주던 큰 형부가 어느 날부턴가 사업이 휘청거리더니 아프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형부는 예순네 살에 위암으로 돌아갔다.


둘째언니는 군인과 결혼했다. 둘째형부는 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화에는 햇빛이 머물다 부서지곤 했다.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은 군복과 아주 잘 어울렸다. 전국을 상대로 형부의 근무지가 변경될 때마다 동생들은 여행하는 기분으로 언니네 집을 다녀오곤 했다. 덕분에 진해. 삼척. 고성. 부산. 일산 등을 숙식 걱정을 안 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집안 행사 때 형부는 지프를 몰고 왔다. 위엄과 절도(節度)가 어우러져 우리 동생들은 가까이 하기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올려다보았다. 군복바지에 베일 것 같은 날 선 주름처럼 말소리도 행동도 각이 져 있었다. 엄마도 사위를 조금 어려워하는 듯 했다. 둘째 사위가 오면 엄마 치마꼬리가 부엌에서 마당으로 그리고 뒤란으로 부지런히 오가느라 비파소리가 났다.


그러던 형부가 어느새 일흔 살이 되었다. 여섯 살 많은 형부와 결혼했던 언니는 지금 예순네 살이다. 형부가 몸이 안 좋다고 한다.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초로의 모습을 한 채 내시경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다. ()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득 안고 형을 언도 받으러 가는 죄인처럼. 우리 가족들은 예순네 살의 불행을 또 겪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했다. 결과는 아니었다. 완전히 반전이다. 언니가 예순네 살에 복사꽃처럼 웃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세월은 참으로 덧없다! 나에게도 몇 년 후에 예순네 살이 다가온다. 64라는 숫자가 꿈틀거린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족을 위해서 잘 헤쳐나가리라 다짐을 해본다. 세월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아무것도 안하면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말을 아끼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더 효력이 있듯, 거물급도 장사도 재벌도 모두 쓰러뜨린다.


언니들은 엄마가 예순네 살에 돌아가셨기에 그 나이 이후부터는 선물 받은 삶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나도 예순네 살을 잘 넘기고 나면 그런 기분일까. 과연 세월은 무엇을 안겨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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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11-06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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