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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정승


이 단 경/수필가


아침부터 전쟁이다. 아홉 살 난 아들이 일어나자마자 학교 가기 싫다고 한다. 달래면서 식탁에 앉혔다. 짜증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평소에 잘 먹던 계란말이조차 맛이 없다면서 생떼를 쓴다. 새 학기가 시작되서 스트레스가 쌓이나보다. 담쟁이덩굴이 담을 타고 기어오르듯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숨을 한번 가다듬고 목소리 톤을 가라앉히면서 협상카드를 내밀었다.

엄마가 누구엄마처럼 하면 네 마음에 들겠니?”

아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기억을 더듬는 것 같다. 네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다닌 유치원 친구 엄마들을 떠올리며 한 명씩 물었다. 친구 엄마들을 자주 만나서 아들도 잘 안다.

아들이랑 제일 친한 친구 동연이 엄마는 날씬하면서 키가 크다. 단아한 모습이 전형적인 동양 고전미인형이다. 해변의 몽돌마냥 동글동글한 얼굴이 작고 예쁘다. 말을 가만가만히 한다. 웃을 땐 소리 내어 웃지 않고, 미소를 지으면서 입 꼬리만 살짝 올린다. 천성이 조용한 성격이다.

동연이 엄마 같은 엄마 어때?”

싫어!”

일언지하에 싫다고 한다. 아마 아들이 잘못을 했을 때 조용히 지적하는 모습이 제 딴엔 어려웠나보다.


다음엔 준희엄마. 준희엄마는 솔직하고 늘 웃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라 친근감이 있다. 시원하고 담백해서 먹고 난 후 입안에 살짝 단맛이 도는 김장철 조선무 같다. 내리 두 살씩 터울로 아들 하나에 딸 둘을 키우면서 많이 힘들 텐데, 항상 씩씩하고 긍정적이다.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때로는 부럽다.

. 그럼 준희엄마는?”

싫어. 준희가 그러는데 자기한테 막 소리 지른대.”

아들의 대답이다. 애들 셋을 키우는데 오죽하랴.

이란성 쌍둥이 시우와 영우엄마는 당당해 보이고 아주 세련됐다. 백합처럼 우아하다. 균형이 잘 잡힌 미스코리아 같은 몸매를 가진 전형적인 도시형 여성이다.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긴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고 늘 웃는다.

시우·영우 엄마는?”

무서워서 싫어ᆞ! 시우가 자기엄마 무섭대.”


요리 실력이 형편없어 재료를 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미각과 후각이 두드러진 아들은 음식을 보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고 먹어보기도 전에 어떤 양념을 많이 넣은 것 같다느니, 접시에 좀 예쁘게 담으라는 등 잔소리를 제법 한다. 게다가 TV에서 하는 요리프로그램이나 신문에 가끔 실린 요리 사진을 보면 그렇게 해달라고 한다. 그때마다 엄마는 전문요리사가 아니라고 못을 박지만, 다양하게 해주지 못해서 마음속으로 늘 미안하다.


특별한 음식만 찾고, 채소는 안 먹으면서 유난히 고기만 좋아하는 늦둥이 아들에게 무엇을 해 줘야 할지 고민스럽다. 아침에 해줄 반찬을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확인해 본다. 집에 있는 재료와 검색한 메뉴가 맞으면 다행이다 싶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반찬을 만드는데 아들은 못마땅해 한다. 노력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할 때가 종종 있다. 아들과의 식탁에서 치루는 전투는 정말 끝이 안 보인다. 임시 휴전만 있을 뿐!


조카 같은 아들친구엄마들을 만날 때면, 젊고 활력 넘치는 모습에 은근히 주눅이 든다.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말을 많이 안 하고 주로 듣기만 하다가 온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랬을까. 아들도 겉으로 표현을 안 하지만 친구들을 부러워 할 것만 같다.


젊고 날씬한 친구엄마들보다 제 엄마가 낫다는 아들이 비록 반찬투정을 할망정 이 순간만큼은 고맙다. 반찬을 입맛에 맞게 잘 해주지 못해서 내 탓이지한다. 하지만 투정 부리는 것을 관대하게 봐 주면 나쁜 버릇이 내내 굳혀질까 걱정된다. 오늘도 그 경계선에서 갈팡질팡한다. 뭐가 옳은 건지.

엄마가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맘에 드는 친구엄마가 없단다. 아들은 슬그머니 계란말이 접시를 제 앞에 놓고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멋쩍게 웃는다. ‘야호!’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은 판정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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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3-24 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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