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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눈물



이단경/수필가

대중목욕탕에 갔다. 겨울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다. 평소보다 특히 노인이 많다. 목욕을 거의 다 끝내고 나오려고 하는데 여든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힘겹게 등을 밀고 있다. 앙상한 고목등걸 같은 모습이다. 다가가서 등을 밀어드렸다. 살은 없고 뼈에 가죽만 있어서 뼈와 가죽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다.


목욕을 하다보면, 어르신의 팔이 뒤로 안돌아가서 힘겹게 닦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나도 곧 저럴 테지하는 젊을 때 못 느꼈던 동질감을 느낀다. 남 일이 아닌 듯, 때로 나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 그래서 어느 날 부턴가 혼자 오신 어르신인지 살펴보고 나서 등을 밀어드리곤 한다. 그분을 위해서라기보다 뿌듯한 기분을 느끼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할머니는 많이 고마워하면서 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신다. 다했다고 했더니 손을 꼭 잡고, 15년 함께 산 며느리가 목욕을 한 번도 같이 오지 않는다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소리 없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목욕탕을 나왔다. 속으로 저도 그랬어요.’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어머니하고 같이 살았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 역시 어머님과 십여 년 살았지만 함께 목욕탕 다닌 것은 열손가락도 안 된다. 일 년에 한 번도 안한 꼴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육십 문턱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떠올리면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서서히 다가와서 그런지 부쩍 생각이 난다. 살아계실 때 왜 좀 더 따뜻하게 해드리지 못했는지.


아버님은 어머님이 사십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아들이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어머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남편처럼 의지하셨다. 외출하는 아들을 배웅하고 옷을 챙겨주는 등, 수발을 다 하고 싶어 하셨다. 철부지 며느리인 나는 어머님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불이 났다 꺼지곤 했다.


어머님은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위해 식구도 없는데 내가 하마.’ 하면서 집안일조차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다 해주셨다. 딸도 없는 외며느리다보니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잘 해주신 것 같다. 시고모님들이 조카며느리 흉을 보면 자기 며느리를 왜 흉을 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신의 시누이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내 앞에서 흥분하시곤 했다.


지금 이 나이가 돼서 어머님 입장이 되어 본다. 지난날, 어머님 앞에서 한 행동이 도무지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어머님은 겨우 한글을 깨친 정도였다. 같이 앉아서 텔레비전의 사극이나 주말드라마를 볼 때, 흐름이 이해되지 않거나 모르는 말이 나오면 종종 물어보시곤 했다. 집중하고 보는데 방해가 된다 싶어 성의 없이 알려드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서운해 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하시곤 했다. 가방끈이 조금 길다고 얼마나 유세를 했던 걸까?


잘난 가방끈보다 경험으로 터득한 어머님의 생활의 지혜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가볍게 다치거나 몸에 조금 이상이 생겼을 때, 민간요법을 알려주시면 의학적 근거가 없다고 적용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설사 터무니없는 말씀이더라도 한번쯤은 한번 해볼게요.’하면서 시늉이라도 해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런 아주 사소한 것조차 헤아리지 못했는지.

어머님은 때로 여자이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서른 살 된 나는 쉰 살이 넘은 어머님이 여자가 아닌 줄 알았다. 어머님과 함께 외출하려고 할 때, 화장을 곱게 하시느라 오래 기다리게 하거나, 얼굴에 오이마사지를 한다거나, 혹은 계절이 바뀔 때 새 옷을 사고 싶어 하시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의 어머님 나이가 되고서야 어머님도 여자였던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아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는 사십대 같다. 아버님은 아프기 시작해서 오년 넘게 앓다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가장 화려하고 원숙한 사십대 후반을 초겨울 김장 끝나고 배추밭에 버려진 시든 배추처럼 고독하고 시들하게 보낸 것이다. 게다가 어린 외며느리인 나는 철이 없었고.


아버님 임종하실 때 어머님이 울면서 벽에 기대고 앉아만 있어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울린다. 오늘 목욕탕에서 어느 할머니의 눈물이 어머님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 가득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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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20 11: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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