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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자전거 여행


이단경/수필가


출발한지 네 시간 만에 남해대교를 건넜다. 노량공원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나서 이순신호국로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기 시작했다. ! 여기가 바로 노량해전을 치른 곳이로구나. 명량영화에서 봤던 바로 그 바다 곁을 지나갔다.


일정은 남해 섬을 한 바퀴(180Km) 도는 것이다. 이른 봄 날씨답게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지만, 초등학생이 소풍을 가듯 기분이 설렌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길옆이 온통 마늘밭이다. 남해는 마늘로 유명하다고 하더니 정말 말 그대로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크지 않은 밭에 마늘이 자라고 있다. 섬에 있는 밭은 온통 파랗게 물들어서 봄을 알려주고 있다. ‘마늘! 너는 춥고 매서운 겨울의 바닷바람을 견디면서 무슨 꿈을 품고 있니?’ 속으로 옹골차게 마음을 다지면서 크고 있는 마늘을 보면서 묻고 싶었다. 그래서 맵고 단단해지는 것일까? 바람에서도 마늘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분다.


하늘과 바다는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선 하나에 그 넓디넓은 몸을 서로 맞대어 의지하고 있다. 제주도의 바다물색이 짙은 비취색이면 남해의 바닷물은 은은한 청자색이다. 우아하면서 수선스럽지 않다. 맑은 바닷물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은 머리를 한껏 꾸미고서 옥색 치마를 펼치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여인들 같다. 도로 가까운 바다에 죽방렴 멸치 양식장이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다. 남해는 마늘과 더불어 멸치가 유명하다고 한다.


바다 곁을 달리면서 길이 조금 평평하다 싶어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 자연을 즐길라치면, 곧바로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진다. 숨이 헉헉 찬다. 오르막의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거리와 높이를 가늠해본다. 저 정도는 올라갈 수 있다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위로한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 곧바로 숨 한번 고를 새 없이 내려간다. 내려갈 때 상쾌한 맛이란. ‘그래 이 맛으로 자전거를 타는 거지하면서 신이 난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좋아할 틈도 없이 또 오르막이 눈앞에 있다. ‘힘들다.’


굴곡이 심한 도로 옆에는 다랭이 논밭이 이어졌다. 한반도 힘센 기운이 내쳐 흐르다 멈추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빠졌는지 지형이 급경사다. 경사가 아주 심한 곳에 섬사람들은 층층으로 경작지를 일구어 계단 같은 논밭을 만들었다.


황토색의 다랭이 밭을 지나면서 문득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시가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한하운 시인이 생각났을까? 여긴 경상도인데. 시의 토막토막 생각나는 부분을 읊어본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나도 힘들어서였을까? 가도 가도 힘든 길의 연속이서였을까? 아니면 전라도는 아니지만 남쪽 끝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해서였을까. 걷지 않고 즐기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는데도 힘이 좀 들기로서니 감히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하다니. 천형을 받고 소록도로 가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혹여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면 몸을 숨기고, 같은 병자나 만나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처지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더운 6월의 전라도 땅을 뭉그러진 발로 걸어가야만 했던 시인. 천분의 일 조차도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없겠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흐른다.


또 긴 오르막이 나타났다. 한 발 한 발 걷듯이 바퀴를 굴린다. 온 힘을 다해서. 한 번은 위를 바라보고 한 번은 아래를 보면서 숨을 가다듬는다. 팔에 힘이 다 빠졌는지 핸들 잡은 손이 떨린다. 정상을 바라보면 너무 아득해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다. 빨리 지친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난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잖아. 뭐 이 정도를 가지고……그러기를 수십 번! 어느새 오르막 정상의 막바지다. 남은 힘을 다 쏟으면서 올라간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거의 걷는 속도다. 등산을 하듯이 천천히, 바늘땀을 한 땀 한 땀 꿰는 것과 같다. 어느 것이든지 하나 씩 모여서 이뤄지는 거겠지. 한꺼번에 손쉽게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뜨거운 햇빛 아래가 아닌 초봄에, 좋아하는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힘들다고 하다니.


처음 자전거 배울 때가 생각났다. 운동장 한 바퀴도 간신히 돌았다. 자전거도로에만 나갈 수만 있어도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전국을 다니고 있다. 물방울이 모여서 강을 이루듯이 한 바퀴가 모여서 수 천키로 나의 자전거여행의 발자취가 되었다.


자전거 여행은 고행과 기쁨을 동반한 여행이라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끝없이 교차하는 것. 한없이 힘들기만 할 것 같아도 곧 즐거운 일이 생기고, 죽을 것만 같아도 극복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1) 지까다비 : 고무로 바닥의 창을 하고 질긴 천으로 만든 양말 같은 신발을 말하는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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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13 00: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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