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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 적





이단경/수필가


몸을 온탕에 담근다.

기분 좋은 상태의 물이 온몸을 미끄러지듯이 휘감는다.

눈을 감는다.

긴장이 솜처럼 풀린다.

천천히 눈을 뜨고 대중목욕탕 안을 둘러본다. 온갖 삶의 민낯이 보인다.


바로 앞에 허리가 미끈하고 다리가 긴 처자가 윤이 나는 검은 비단실 같은 머리를 감고 있다. 피부가 투명한 상아빛이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뒷모습이 싱싱한 물고기 같다.


엉덩이는 어찌 저리 사과처럼 예쁜지.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까. 거의 방치하다싶은 내 몸을 슬며시 내려다본다. 삶의 경륜이 붙은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머리를 다 감은 후 허리를 펴는 그녀를 바라본다. 아쉽게도 가슴이 빈약해서 마치 조그만 접시를 얹은 것 같다. 다 갖출 수는 없나보다.

일주일에 두세 번 동네의 작은 대중목욕탕을 찾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감기 예방에도 좋은 것 같다.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한 나의 처방중 하나다. 자주 가다보니 때를 힘들게 밀지 않아 여유롭다.

온수를 틀어서 탕의 온도를 높인다. 나이에 비례해서 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걸까. 감각이 점점 무디어진다. 눈이 섬세한 건 잘 안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듯이 피부의 느낌도 둔해져 오나보다. 아니면 몸이 점점 식어져서 뜨거운 것을 원하는 건지.

탕 안에서 중년 여자 셋이 목욕탕 모임을 하는지 커피를 마시면서 신나게 얘기 한다.

정보도 주고받는다.

성형시술을 잘하는 병원부터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까지.

혹시 나중에라도 요긴하게 쓸 정보가 있을 것 같아 은근히 관심을 갖고 귀동냥을 한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더니 나도 아직은 여자인가 보다.


바로 옆에서 모녀가 나란히 앉아 비누칠을 하더니 온탕에 들어온다. 늙은 엄마를 모시고 목욕탕 오는 중년의 딸이 부럽다.

모녀가 붕어빵이다. 딸이 늙으면 노인처럼 되겠구나.

예순네 살에 돌아간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살아 계시면 지금 미수(米壽). 살아 계시면 엄마랑 같이 목욕을 왔을까, 아니면 힘들다고 혼자 왔을까 헤아려본다. 엄마랑 목욕을 같이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살아계시면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부러워만 하고. 내가 정작 늙어서 혼자 오기 어려울 땐 누구랑 같이 오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여든이 훨씬 넘은 듯한 노인은 온탕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턱에 걸터앉는다. 거북이 같은 몸짓으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천천히. 살이 지층처럼 겹겹이 늘어지고 탄력이라고는 전혀 없다. 살집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골반 뼈가 드러난다. 노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물어가는 삶을 생각한다. 나도 늙으면 저렇겠지.

탕 속에 있으니까 답답증이 생겨 밖으로 나왔다. 옷장 열쇠고리를 발목에 끼웠다. 타일 위를 걸을 때 마다 열쇠가 바닥에 닿으면서 쇳소리가 났다.

문득 영화에서 본 죄수들의 발목에 끼워진 쇠사슬이 떠올랐다. 우린 모두 세상이라는 굴레에 갇혀서 수형생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의 구석구석에 있는 때를 닦아 내듯이 마음에 지은 온갖 때도 닦을 수만 있다면.


목욕이 끝날 즈음 자리를 정리한다. 대야와 의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는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주변에 떨어진 머리카락까지 물로 흘려보낸다. 바닥에 있는 몇 가닥조차 없앤다고 물을 낭비한다.


이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사람이 스쳐지나간 곳을 자국이 아주 없게 할 수 없을 테지. 괜히 결벽증 있는 사람모양 유난을 떤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것도 나의 흔적을 가장 오래도록 남기고 싶어 하는 바람인데. 작은 흔적을 구태여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오히려 큰 흔적을 남기려는 마음을 알 수 없다. 이 양면성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반듯하게 살려고 애쓰면서 작은 것에 늘 만족해하신 유흔이 지금, 나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하다 싶어도 마음은 편안하다. 어차피 살아온 자취를 없앨 수 없다면, 부모님처럼 좋은 흔적을 남겨야 할 텐데. 나는 자식에게 어떤 모습을 남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겨우 앉는 자리를 차지하고 난 후, 내 집처럼 편안하게 목욕을 끝내고 나서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욕탕 문을 나설 때, 문득 떠오른다. 집도 잠시 사는 동안 편안하게 사용하다가 떠나면 결국 물려주고 가는 것을. 물욕을 내지 말아야겠지.


이렇게 내가 목욕탕 문을 나서듯이 세상의 문을 나설 때 모든 것을 놔두고 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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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09 1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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