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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망명 새벽에 만든 조선 매매계약서(3)
  • 기사등록 2020-12-04 18: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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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망명  새벽에 만든 조선 매매계약서(3)




밤이 이미 깊어져 구름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달빛을 더듬어 싸릿재를 넘어 걷기 시작했다. 이 밤 안으로 인천을 벗어나야 했다. 복만을 백가객주로 보내어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중요한 소지품만 챙겨 봇짐을 메고 아이는 숙향이 업었다. 그리고 길재와 석태와 함께 서울로 동행하기로 했다. 낮에는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발걸음은 조금씩 늦어졌고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마포 나루터의 물상객주집을 찾은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이 되어서였다.


남의 눈을 피해 오느라 일부러 변장을 하고 사람들 인적이 드물 때 이동을 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하였다. 변장이라 해 봐야 그래도 장사꾼 행색이 제일 편하고 손쉬웠다. 옷을 남루하게 보이려고 복만과 환의(換衣, 옷을 바꿔 입는 것)를 하고 나오니 영락없는 보부상 행색이 그대로 베어 나왔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이미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운이 들었다. 을사늑약 후 개통된 경의선 철도가 이젠 만주를 지나 유럽까지 연결된다고 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급행열차인 융희호는 이미 사람들로 만석이 되었다. 신의주로 가는 열차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드디어 용산역에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가 도착하자 준마는 숙향과 아들 광복을 데리고 열차에 올랐다. 서양식 양복과 양장으로 멋을 낸 준마 부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고는 천천히 열차에 올랐다. 신의주행 철도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지나 유럽까지 연결되었다. 일본은 철도 부설을 하면서 미개한 조선이 이 철도를 통해 산업이 발전하고 조신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개선하는 데 일본 정부가 큰 도움을 준다고 선전해 왔다. 일부 어리석은 조선의 귀족이 앞장서서 마치 일본이 조선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으로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좁은 소견으로 조선을 위해 그렇게 선심을 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조선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 체류했던 맥킨지는 일본이 조선의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제가 조선에서 제국주의 통치의 가장 거칠고도 무자비한 보습을 보여 주었다.”고 개탄했다.


당시 세계의 철도 건설을 위해 1마일당 16만 원의 비용이 들었으나 조선에서의 철도 건설비용은 불과 6만 2,000원에 불과했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토지매입과 건설과정은 거의 조선인들에게서 땅을 무상으로 빼앗거나 싸게 매입하였는데 선로용지와 정거장 부지를 시가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 가격으로 탈취하였다. 농민이나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노역을 시켰으며 이에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개 처형하였다. 마치 철도를 공짜로 부설하여 준 것으로 선전하였으나 실제로는 철도부설 비용은 싸게 공사하는 만큼 일본 정부가 그대로 곡물이나 광물 또는 다른 이권으로 빼앗아 간 착취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초청하지도 않은 손님 일본이 아무런 이유 없이 조선을 위해서 철도를 놓아 주었을까? 철도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게 천지개벽할 일이라고 하면서 고마워서 손을 들어 환영하기까지 했다. 실은 천지개벽은 맞았으나 고마워할 일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까막눈이 조선 백성은 그렇게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백의민족이었다.
실제로 조선의 상업과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는 큰 혜택이 없었던 것이다. 이 철도를 이용하여 일본은 만주침략을 위한 병참이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어수선한 짐 옮기는 소리가 잠잠해지면서 기차는 서서히 역을 출발하였다. 길게 이어 붙인 열차 뒤편에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 후 러시아로부터 인수받은 남만주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새로 만든 관동주(關東州) 소속 관동도독부 주둔지로 향하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들고 배낭을 멘 채로 줄을 지어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용산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난 후 열차는 개성에 도착했다. 목재로 지은 크지 않은 역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절모자를 쓰고 양복을 차려 입고 가죽가방을 든 사내들을 태우고 열차는 다시 북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여전히 한적한 은둔의 조선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판의 소란스러운 광경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한가하고도 평온함에 잊혀졌다.
평양역에 도착하자 일단의 일본 군인들을 내려놓고는 열차는 다시 계속 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노을이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양떼 같은 구름에 걸린 붉은 노을 사이로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 듯한 노루 한 마리가 노을 위로 잠시 스쳐 가는 것이 보이더니 이내 먼 대지 위로 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출입문이 열리면서 객실 검표원이 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눈을 매섭게 뜬 한 사내가 검표원과 함께 검사를 하면서 승객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매가 사냥감을 찾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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