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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 단 경/수필가


이번엔 섬진강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를 구석구석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만 있었다. 자전거를 배우고 난 후, 마음먹은 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올 봄부터 4대 강변 여행을 다닌다. 가까운 한강을 시작으로 해서 금강,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 일부 구간을 다녀왔다

 

섬진강의 첫인상은 시골 소녀 같다. 뽐내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실에 있는 섬진강댐에서 출발하고 30분 정도 지나니 김용택 시인 생가 앞에 다다른다. 마을 앞에 흐르는 강은 강이라기보다 마을 앞개울 같이 친근하다. 아마도 가물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두 달 전에 다녀온 낙동강이 씩씩하고 튼실한 청년이라면, 섬진강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영락없는 소녀다. 낙동강은 위협적이어서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그저 멀리서만 바라볼 뿐. 섬진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흐른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마치 손을 내밀면 잡아줄 것 같다. 잔잔한 수면은 수줍어하면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단풍을 기대하고 갔는데 조금 일렀나보다. 그런데도 실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단풍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면서 은은한 파스텔톤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큰 개울 같은 강물에는 군데군데 바위가 박혀있다. 그 위에 하얀 왜가리들이 우아하게 서 있다. 고고한 자태를 뽐낼 수 있도록 강물이 수선스럽지 않고 조용히 흐른다.


순창의 장구목 주변을 흐르는 곳은 큰 바위들이 엉켜있는데 하나같이 부드럽다. 강물은 심성도 순해서 무엇이든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부드러운 사람 옆에 있으면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한없이 안아줘서 바위조차 둥글게 만들어준다. 바위도 처음엔 모가 나고 투박했으리라.


수 천 번, 아니 수 만 번을 포기하지 않고 어루만져주어 둥글게 해주었을 것이다. 바위를 바라보면서 순간 나는 얼마만큼 아들을 안아주고 달래줬나. 어린 아들과 대치 될 때, 가끔 지쳐서 나도 모르겠다.’ 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강물처럼 해야 할 텐데. 때로는 반찬 투정을 하거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 때 아이를 이해시키기보다 강압적으로 안 된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큰소리가 오가고. 그 때가 지나면 왜 좀 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이면서도,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는 명분아래 더 모가 나게 만들었던 건 아닌지.


강 주변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뒤란에도 큰 감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떨어진 하얀 감꽃을 주어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렇다하게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감이 익어갈 때는 초등학교 다녀와서 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뒤란부터 달려가서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다. 흙이 묻은 감조차 살살 털어서 먹곤 했다. 지금의 아이들이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여닫으며 간식을 찾는 것처럼. 그 때는 그곳이 바로 냉장고였다.


이 곳 감나무는 크지 않지만 감은 많이 열렸다. 높지 않아서 손을 뻗으면 딸 수 있다. 사과나무처럼 낮고 가지가 넓게 퍼져 있다. 가지마다 어른 주먹만큼 큰 주황색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가지가 찢어질까봐, 늘어진 가지 밑에 지주를 받쳐놓았다. 그걸 보는 순간 엄마가 떠오른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를 얼마나 위태롭게 했을까. 자식이 많아서 당신 몸도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엄마를 받쳐주는 지주는 무엇이었을까. 강물에 홍시를 닮은 해가 떠 있다

 

곡성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여행을 시작한다. 몸도 자전거도 습기를 머금은 듯 무겁다. 페달이 힘겹게 넘어간다. 후미등과 전조등을 켜고 달린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짙은 안개 속에서 깜박이는 후미의 빨간 등은 반딧불이가 반짝거리는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구례를 지나 하동을 맞는다. 하동의 토지배경이 떠오른다. 들녘에는 온통 금이 깔려있다.


하동을 지나 목적지 광양만 바닷가에 닿았다. 섬진강 종주 자전거 길은 임실에 있는 섬진강댐을 시작으로 해서 광양만 배알도 수변공원을 끝으로 154킬로미터다. 자동차로 두 시간이면 가는 거리지만 자전거로 10시간 좀 넘게 걸려서 12일로 다녀왔다.


승용차로 여행을 할 때면, 고속도로로 다녀오거나 어쩌다 국도로 다녀올 뿐, 늘 가던 길로만 다니게 된다. 그것도 옆은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다.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하다보면 국토의 속살을 보는 듯하다. 작은 길에 있는 리 단위의 마을이나 더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깨를 터는 농부도 만나고 안노인들이 모여앉아서 콩 타작하는 모습도 본다. 마을 안쪽 길을 지날 때는 어르신들이 주름 잡힌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담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든다. 담장도 낮고 처마도 낮은 집들 옆을 지날 때면, 내 마음까지 낮아지면서 포근해지고 정감이 간다.


자전거 여행은 소박하면서 인간미가 살아있고 따뜻하다. 특히 요즘처럼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과정을 무시하는 세태에서, 자전거여행 만큼은 과정도 중요하게 여긴다. 목적지에 가더라도 천천히 즐기면서 가는 것이 자전거여행의 묘미다. 자전거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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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9-11 1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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