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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이 단 경/수필가


오래 전 그리스·이집트 패키지여행을 갔다. 에게해 바닷가 어느 식당에서다. 점심식사 후, 후식(後食)을 먹으면서 옆 사람과 조심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 때 일행 중에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등이 약간 굽은 초로의 남자 한 분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일행들은 대화하다 말고 아프리카 미어캣처럼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분은 하모니카를 꺼내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슈베르트의 송어를 멋지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은 모두 하면서 듣고 있었다.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두 숟가락의 볼록한 부분을 마주 대고 캐스터네츠같이 부딪히면서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곧바로 외국인과 우리 한국 여행자들이 하나가 되어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조심스럽게 인사 정도 나눴는데, 마치 둑에서 봇물이 터지듯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하모니카 한 곡이 불편한 옷을 입고 있다 벗어던진 것처럼 편안한 자리로 바꿔놓았다. 만난 지 이틀이 지나도 별로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해 보였던 분이 갑자기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하모니카가 여행 다닐 때 아주 좋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았다. 귀국을 한 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아들이 여섯 살 때 동네에 있는 피아노학원을 데리고 갔다. 아들은 낯설고 불안한지 엄마를 학원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입구에 있는 휴게실에서 피아노레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피아노, 오카리나, 리코더 등의 악기소리, 수업하는 선생님의 말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등 온갖 소리들이 좁은 공간으로 떠다닌다. 한쪽 구석엔 어린 주인들이 집어 던진 가방들이 여기 저기 쓰러져 있고 실내화는 가방 속에서 삐죽이 나와 있다. 두꺼운 겉옷들도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왜 그렇게 더디 가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더 지루한 것 같아 가벼운 책을 편다. 집중이 되지 않아 읽은 곳을 또 읽고 제자리를 맴돌다 일어나서 유리창으로 간다. 파란 하늘과 먼 산을 바라본다. 가을 하늘은 어쩜 그리도 맑고 파란지. 가질 수 없을 때 더욱 좋아 보이 듯,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창을 통해 바라보는 하늘은 더욱 파랗다.


막대로 툭 치면 파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다. 멀리 위를 바라보고 있던 눈을 아래로 내려뜨려 학원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본다. 2층에서 내려다 본 운동장은 졸업 후 처음 찾아갔을 때 교실의 의자가 너무 작아서 놀랐던 기억에서처럼 좁았다.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면 아들이 엄마하면서 환한 얼굴을 하고 휴게실로 온다.


아들과 함께 학원을 다닌 지 이 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송년 발표회를 준비하느라 어린이들이 작은 악기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때 낯익은 악기음이 들렸다. 유난히 가늘고 청아한 소리였다.


순간, 그리스 식당에서 하모니카 연주 장면이 영화처럼 오버랩 되었다. 장롱을 정리하다 낡은 옷에 얽힌 추억이 떠오르듯, 잊고 있었던 송어노래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고 있었다. 당장 배우고 싶었다. 원장한테 기본 음 자리를 배우고 난 다음 혼자 불다가 청소년수련관에서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동요만 불러도 행복했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바로 위 언니가 놀러오면 하모니카를 부르면서 들어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형편없는 연주였건만, 하모니카에서 소리 나고 노래가 되는 것만 신이 나서 불렀다. 듣기에 좋지 않았을 텐데도 언니는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면서 들어주었다.


가곡 가고파를 불 때면 파란바다에 하얀 파도가 물결치는 모래밭이 떠오른다. ‘목련화를 불면 희고 순결한 목련꽃이 활짝 핀 교정을 거닐던 여고시절로 돌아가고.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를, 이곳과 저곳을 넘나들면서 행복한 상상속의 여행을 떠난다.


안 좋은 상황이 항상 나쁘지만은 않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피아노 교습을 받는 어린 아들을 우두커니 기다릴 때 많이 무료하고 답답했다. ‘빨리 커서 혼자 학원을 다녀왔으면하고 보낸 시간들이 오히려 잊고 지냈던 하모니카를 불게 했다. 혼자 걸으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모니카를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늘 음악과 함께 하다 보니 홀로 있어도 그렇게 외롭지 않다. 하모니카가 봄 햇살 같은 환한 세상을 열어주었다. 더없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아들이 자라는 것만큼 하모니카 실력도 점점 나아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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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12 22: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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