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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고

 


이 단 경/수필가

 

갑자기 불이 안 들어온다. 취사 작동 버튼을 다시 눌러본다. 이상하다. 분명히 어제까지도 잘 됐었는데. 전기압력밥솥을 이리저리 살핀다. 평상시처럼 늘 똑 같이 사용했건만 오늘 아침 반응이 없다. ‘11년 됐으니 고장 날 만도 하지하면서도 밥을 하려는 순간 작동을 하지 않는 밥솥이 왠지 야속하다

 

그동안 말없이 잘해준 건 다 어디가고 밥솥이 오히려 내게 서운하겠네.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고장 난 전기압력밥솥을 손으로 쓸어본다. 동생이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밥을 먹을 때면, 밥이 참 맛있다고 했다. ‘언니 네는 반찬은 없어도 밥이 맛있어. 밥솥이 좋아서 그러나하면서 찬찬히 살펴보곤 했다. 그런 말을 들어서 인지 더욱 애착이 갔다. 그런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말 잘 듣는 동생처럼 고장 한 번 일으키지 않았다. 전자제품 사용연한이 10년이라고 해서, 구입한지 십 년을 넘기고부터는 고장이 날까봐 다른 기능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밥만 했다

 

그나저나 아침밥을 해야 하는데? 서둘러 창고에 처박아 놓았던 일반압력밥솥을 꺼낸다. ‘꿩 대신 닭평소에 눈길한번 안 주던 것을, 깨끗이 닦고서 쌀을 안친다. 아무 예고도 없이 전기압력밥솥이 멈춘 순간, 이십여 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다.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해 여름, 갑자기 엄마가 아프다고 했다. 엄마는 평소에 병원 한번 안 갈 정도로 건강했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프실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딸만 여섯이고 아들이 하나도 없는 집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 큰일이었다. 엄마의 유일한 자존심은 아버지가 오래 사시는 거였다. 그래야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엄마의 논리다

 

그러던 엄마가 너무 아프다고 하면서 쇄골 뼈 주변에 몽우리가 잡힌다고도 한다. 우리 형제들은 그때서야 서둘러 종합병원에 모시고 갔다. 결과는 췌장암 말기. 의사는 전신에 다 퍼져 손을 쓸 수 없다면서 육 개월 남았다고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것인가. 신의 저주를 받고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걸 맛보았다. 가족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병원 다니기 바빴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이별의 준비도 없이. 남은 육 개월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곧 바로 항암치료 받으면서 늦가을 된서리 맞은 배추처럼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혼자 앉을 힘도 없이 축 늘어져서 가족들이 뒤에서 안고 있어야만 했다. 이미 엄마는 세상의 끈을 놓은 모습이었다. 초기 때 알았더라면, 미리미리 엄마랑 여행도 다니고, 많은 이야기도 나눴을 텐데.


엄마는 열일곱 살에 지아비의 아내가 되었고, 사는 게 바빠 꿈을 이룰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결혼 50주년을 3년 앞두고 많이 아파하는 엄마를 보면서 금혼식에 여행가기로 했는데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자식들을 낳고 키우면서 엄마의 꿈은 석양의 노을이 사라지듯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엄마는 그저 자식들을 위해서만 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늘 엄마자리에 그렇게 있을 것 같았고. 난 또 뭐가 그리도 바빠서 같이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는지.


엄마는 예순네 살에 의사의 말을 정확히 입증하듯 그렇게 6개월을 살고 하얀 눈이 쌓여있는 산등성이로 갔다. 아버지가 홀로 계시는 집에 우리 부부가 들어갔다. 안방 벽에 엄마가 있는 가족사진이 그대로 있고 엄마의 손때가 묻은 살림살이가 제자리에 다 있건만, 엄마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어쩌면 아픈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예고니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을 앓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리교수는 제자인 저자 미치 앨봄에게 내 몸이 천천히 시들어가다가 흙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갖게 되니 한편으로는 멋진 일이기도 해.’라고 말한다.


평상시 사용하지 않았던 일반압력밥솥에 밥을 하면서 사용방법이 헷갈린다, 불은 언제 꺼야할지 냄새를 계속 맡아보다가 혹시 탈까봐 조마조마해서 껐다. 밥이 온전히 됐을까 걱정을 한다. 쌀을 안치기만 하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밥이 다 됐다고 알려주는 전기압력밥솥이 많이 편했다는 것에 새삼 고맙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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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4-21 21: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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