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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이 단 경/수필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큰댁을 다녔다. 아버지는 마다하지 않고 셋째 딸을 데리고 명절 차례와 제사를 지내러 갔다. 엄마는 두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내 차치가 될 수 없었기에, 아버지를 쫒아갔다. 명절 때 큰댁을 가면 사촌들을 만나서 반갑고 특별한 음식이 많아서 더욱 좋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왜 차례를 안 지내는지 그것만 섭섭했다. 궁금한 게 많은 어린 딸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늘 자상하게 알려주는 아버지와의 동행은 참 편안했다.


추석 전날 점심을 먹고 난 후, 아버지는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둔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하얀 옥양목 두루마기 앞섶을 휘날리며 집을 나선다. 초등학교 일학년, 단발머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새 신발을 신고서, 첫눈이 온 날 폴짝거리는 강아지처럼 아버지 앞에 간다.

집을 나설 때는 나들이 가는 것만이 신이 났지만 버스도 안 다니는 십리길 신작로를 걷다보면 다리도 아프고 이내 지루 했다. 아버지는 때로 투정 부리면서 따라가는 어린 딸을 달래가며 손을 잡고 간다. 아버지의 큰 손은 얼마나 따뜻한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처럼. 아버지 손안에서 내손은 꼼지락 거린다. 조금 가다 손을 놓고 길거리에 뭐가 있는지 살펴본다. 그러다 저만큼 앞서 가는 아버지를 향해 막 뛰어가면서. “아부지 어디쯤 왔어?”


여덟 살짜리 계집아이가 바라본 아버지의 등은 큰 바위 같다. 아버지는 그 때 마흔두 살.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아마도 아버지 생애에서 가장 멋진 나이였을 거라 생각된다. 돌이켜보면 40대가 제일 좋았다. 그 때는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어느새 나에게조차도 아득한 나이가 됐는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결핵늑막염을 앓았다. 중요한 시기에 학교를 두 달 넘게 쉬었다. 늦가을에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한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수업 시간 중 교실 문 앞에 반백의 아버지가 후줄근한 잠바를 입고 주저하는 태도로 문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오십 여명 되는 우리 반 여학생들은 까르르 웃어댔고 난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만일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더라면 철없는 나는 친구들 앞에서 으쓱했을까?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을 바라보니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마친 아버지가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진 모습으로 교정을 걸어가고 있었다. ‘가을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누라도 나무 신짝을 가지고 나온다고 할 만큼 가을걷이로 정신없이 바쁜데 잠시 틈을 내어 학교를 찾아온,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 순간 창피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더욱더 죄송스러웠다.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전교에서 등수가 한자리수로 공부를 아주 잘 했다. 몸도 건강하지 않고 동생보다 공부도 못하는 딸 때문에 고민을 얼마나 많이 하셨을까.

그날 저녁, 아버지는 출석일수가 졸업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니 차라리 일 년을 유급해서 3학년을 더 다니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어린 생각에 후배들하고 같이 공부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그냥 졸업을 하고 말았다. 성적조차 엉망이어서 원하는 대학교를 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앞날에 편안한 삶을 살게 해주려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십분이나마 헤아리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했다. 만일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일 년을 열심히 공부한 후, 항간에서 말하는 좋은 대학을 들어갔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지 않은 길에 아쉬움이 남는다.


아버지가 일흔이 되신 그해 겨울, 엄마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위하던 가족을 남겨두고 멀리, 아주 멀리 갔다. 아버지는 비 맞은 중처럼 초라했다. 우리 부부는 친정집으로 들어가서 혼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옷차림만큼은 신경 써서 깨끗하고 따뜻하게 입게 해 드렸지만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추워보였다.


강아지를 벗 삼아 앞세우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러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엄마를 떠올렸다. 어느새 아버지의 등은 내 눈높이에 와 있었다. 딸 여섯을 키워 결혼을 시키고 난 후, 몸도 왜소해졌다. 게다가 엄마까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난 후였으니.


나에 대해 실망을 하신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교정에서 차츰차츰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수 십 년이 흘렀어도 가슴이 먹먹하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매미가 탈바꿈 하느라 벗어놓은 투명하고 바삭한 껍질처럼,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고 고스란히 껍질만 남았다가 점점이 사라져 가슴속에만 남은 아버지.

부모란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몸소 보이고, 모든 걸 남김없이 주고 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은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아들이 바라보는 내 뒷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이 글은 중국의 시인 주자청(1898~1948)이 그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산문 아버지의 뒷모습을 읽고 난 후, 1998년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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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3-12 20: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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