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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날

 


이 단 경/수필가


수필수업 가는 날이다. 아침 아홉시, 평촌역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 가다가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안국역에서 내린 후, 도보로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교실에 도착한다.


바쁜 시간이라 감히 앉아가는 건 꿈도 못 꾼다. 환승역인 사당역에서 앉으면 다행이다. 키가 작아서 좌석 바로 앞 천장에 매달려 있는 손잡이를 잡고 책이라도 볼 수 있는 위치를 찾으면 그야말로 감지덕지!


오늘도 역시 지하철 안은 붐빈다. 좌석 앞에는 마치 사극에서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서 있는 것처럼 겹겹이 진을 치고 있다. 하모니카 수업까지 받아야 해서 가방은 더욱 무겁다. 초여름 칡넝쿨이 우거진 야산의 산길을 헤치듯이 겨우 좌석 앞까지 나아간다.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이 한 발자국씩 양쪽으로 물러난다. 그 틈 사이로 몸을 비스듬히 비집고 선다. 바로 앞좌석에 앉은 사람의 구두 앞에 가방을 놓았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책을 들었다. 책을 한 페이지나 읽었을까. 앞에 앉은 사람이 인덕원역에서 내릴 역을 그때 안 것처럼 용수철 튕기듯이 뛰쳐나간다.


순간, 양옆에 나를 위해 조금씩 자리를 양보해준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다. 모두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다. 개구리가 잠자리를 재빨리 낚아채는 것처럼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들고 얼른 의자에 앉았다. 아마 평소 하던 행동보다 두 배는 빨랐을 것이다. 자리에 앉고 보니, 왠지 남의 자리를 가로챈 것 같아 마음이 살짝 불편해온다.


책을 꺼냈다.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책에 고정시킨다. 한 여자가 내 앞에 선다. ‘어쩐다지? 난 충무로까지 가는데.’ 말해주고 싶다. 다시 책을 읽고 있는데 옆에 앉아 졸고 있는 남자의 고개가 자꾸만 내 어깨위로 떨어진다. 어깨에 가끔 통증이 있어 신경이 쓰여서 살짝 피하면 고개를 바로 한다. 시선을 책에 고정한다. 그때 노점 상인이 들어와서 무릎 보호대를 홍보한다. 겨울엔 무릎을 보호해야한다면서. 책은 어디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읽는다.


서너 페이지 읽었을 즈음, 어디쯤 왔나 궁금해서 창문 밖을 바라보니 사당역이다. 어느새 나를 위해 양보해준 두 사람도 다 내리고 없다. 복잡하던 지하철 안 통로가 앞이 뻥 뚫린 고속도로 같다. 그새를 못 참고 남의 자리를. 그래봐야 여덟 정거장 지나면 차안이 이렇게 여유가 있는데.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순서에 의해서 앉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부질없이 중얼거려본다.


가끔 지하철에서, 자리를 잡는 거에 따라서 속으로 그날 운을 점쳐보곤 한다. 일찍 앉으면 하루 동안의 운은 아주 좋을 거라고 나에게 최면을 건다.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 싶어진다. 비록 남의 자리를 살짝 꿰찬 것 같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몇 정거장 더 가야하는 사당역도 아니고, 평촌역 바로 다음역인 인덕원역에서 앉았으니. 하루 종일 좋은 일이 날 위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사실, 오늘은 시아버님 제사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서둘러 가야 한다. 특별히 즐거운 일이 생길 건 없다. 제사 지낼 음식을 만드느라 힘들기만 할 뿐. 그렇지만 직접 만든 여러 가지 제사 음식을 가족과 함께 먹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음복까지 하느라 술 한 잔도 가볍게 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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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25 11: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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