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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창고 


 

이 단 경 / 수필가

김원일 소설집 비단길울산 댁을 읽었다. 작가는 울산 댁은 친할머니 나이 뻘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중략), 전쟁을 만나 피란 내려온 나를 부모 정 모른 채 고향 장터에 버려졌다 하여 친손자인 듯 받아들여 거두었다고 했다. 문득 어릴 때 이웃집 오빠네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챙겨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도 울산 댁 같은 소중한 이웃 아주머니가 계신다. 우리 가족은 택호를 오빠네 아주머니라고 지칭했다. 엄마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고 서울에서 나서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아들 하나 낳고서 작은댁한테 남편을 빼앗기고 청상과부처럼 지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동네에 남편은 살고 있었다. 머리는 단아하게 쪽을 짓고 늘 비녀를 꼽고 계신 모습이 꼭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서희할머니 윤 씨 부인 같다. 50대 중반쯤이었던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은 유년시절부터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다

 

아주머니의 유일한 아들인 오빠는 말이 오빠지 엄마보다 열 살 아래여서 삼촌 같다.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서구 형 미남인데다 농구선수처럼 키가 컸다. 동네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다르게 오빠는 도시적인 이미지로 깔끔했고 항상 책을 읽고 있어서 왠지 가까이 하기엔 어려웠다.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이미 임용고시를 보고 나서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들에 다니면서 농사일로 바빠 자식들을 잘 건사해주지 못할 때, 오빠는 예비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공부를 가르쳐 주고 귀지도 파주고 또 손톱도 깎아 주곤 했다. 밤에는 한글을 더듬더듬 읽는 동네 학생들을 서너 명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다.


오빠 네와 우리 집은 울타리 하나가 경계였다. 우리 식구들은 대문을 놔두고 구멍이 술술 뚫린 뒤란 울타리를 통해 무시로 건너다녔다. 아주머니는 식구가 단출해서 생선찌개나 고깃국을 끓일 때면 일부러 넉넉히 끓여서 두 그릇만 남기고는 냄비 째 갖고 울타리를 넘어 오셨다. 우리 집은 식구가 일곱. 오물오물 모여 앉아 맛있게 먹었다.(막내는 태어나기 전이다). 농촌에서는 생선이나 고깃국을 좀처럼 먹기 어려운 때였다

 

엄마는 농사지은 채소를 정갈하게 손질해서 직접 갖고 시장에 가서 팔아 생활비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저녁때를 훌쩍 넘어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겨우 젖을 뗀 일곱 살 아래 동생을 업고 목을 길게 빼고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오빠네 아주머니가 집에 와서 저녁을 챙겨주시곤 했다.


라디오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 저녁을 먹고 나서 연속극을 듣기위해 하루가 존재하는 것처럼 엄마하고 아주머니 댁으로 부리나케 간다. 특히 겨울이면 엄마는 뜨개질 꺼리를 갖고 가서 뜨끈뜨끈한 아랫목 이불속에 발을 넣고 연속극을 진지하게 듣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온 촉각을 세우 듯 집중한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또 슬퍼도 하면서. 긴 겨울밤은 그렇게 달콤하게 익어갔다.


아주머니는 오빠가 중학교 국어교사로 발령이 나서 타지로 떠난 후 소일거리로 하얀 염소 한 마리를 키우셨다. 엄마가 시장에 가거나 들에 나갔을 때, 돌이 막 지난 동생이 배가 고파 울면 염소젖을 끓여서 먹이셨다. 그 당시 동생은 밥보다 염소젖을 더 많이 먹었다.


오빠는 포천에 있는 중학교에 근무하다 몇 년이 지난 후, 수원으로 전근가면서 아주머니를 모셔갔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이었던 것 같다. 아주머니는 평생을 수절 하시다 3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오빠는 장학관과 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은퇴하셨다. 지난 몇 년을 힘겹게 암과 투병하다 여든 해를 사시고 작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 아파트에 산다. 문만 열면 바로 옆집이다. 마당도 없어서 불과 다섯 발자국도 안 되서 바로 거실이고 방이다. 현관문은 철문이고 벽은 단단한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혹시 작은 소리라도 옆집에 들릴까 전전긍긍하면서 더욱 웅크린다. 문만 닫으면 바다위에 떠 있는 섬이다. 사람 사는 모습이 거의 비슷비슷하련만 혹여 책잡힐까 싶고, 누설되면 큰일이라도 나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문을 꼭꼭 닫고 산다. 어릴 때 오빠네 아주머니와 같이 지내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지금도 두 모자분을 생각하면 추운겨울에 군고구마봉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진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년의 기억이다. 우리 세대에서는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값진 선물을 부모 세대에서 물려받았다. 좋지 않은 뉴스로 세상이 시끄럽고 각박할 때면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꺼내 보듯이, 훈훈한 장면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마음을 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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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11 08: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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